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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식 작가의 망우리 이야기 16-중랑구의 애국지사 6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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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1.08.31  15:5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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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인은 출생지, 활동지, 귀양지, 영면지(이장지까지) 모두 소중하다. 각지역은 어느 것에든 해당하는 인물을 지역의 위인으로 소개한다. 중랑구의 경우, 망우리공원의 위인은 대부분 파악된 상태인데, 지역 출신 인물은 조선시대 후로는 보이지 않는다.

각성을 촉구하는 의미에서 중랑구 6인의 애국지사를 소개한다. 망우리 3.1운동의 주모자급으로 추정된다. 신내동 한 분, 상봉동 한 분, 면목동 네 분으로 계 6인이다.

우선, 신내리 622에 사는 서당교사 이정(李政, 1874~1959)이라는 분이 있었다. 1919년 10월경에 유림 대표로 대동단(총재 김가진)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11월 27일 체포되어 다음 해 1920년 12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사망시 주소는 신내리 621번지이다. 2008년에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다음으로, 1920년의 대한독립단 사건으로 검거된 분들로 1990년에 애족장을 받은 최승환(상봉리 321, 1873∼1968), 고윤원(면목리 1292, 1893~1950), 안흥기(동 1267, 1885~1959), 안영기(동 1277, 1893~1925), 손명근(동 1262, 1871~1942)의 5인이 있었다.

구리면 사노리 출신의 김규식(1882~1931)은 1912년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하였는데, 1919년 5월, 한석남을 데리고 국내로 들어와 상봉리에서 미곡상을 경영하는 유학자 최승환에게 소개하였다. 김규식, 한석남을 포함하여 최승환은 독립군의 국내 침공을 맞을 준비를 한다는 의미의 대한독립군환영단을 조직하고 단장을 맡았다. 격문의 인쇄와 배부, 군자금 모금이 주목적이었다.

면목리의 손명근, 고윤원 외로 회기리의 이섬, 김선문, 이문리의 김원제, 청량리의 권학규 등도 단원이었다(이섬 신문조서). 김선문, 김원제, 권학규는 재림교인으로 동교 출판사 시조사(1912~)의 인쇄 시설이나 기술을 제공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1919년 11월, 만주의 대한독립단(총재 박장호)은 김기한, 강지형 등을 국내로 파견하여 국내에 지단을 설치하고자 하였다. 대한독립단은 1910년 국권 피탈 후에 해외로 망명한 의병들을 중심으로 1919년 4월 15일 남만주 유하현 삼원보에서 결성되었고 후에 임시정부의 광복군으로 합류된 단체였다.

김기한, 강지형 등의 입국 이전에 이미 7, 8월경에 조맹선(총단장), 김유성(참모부장)의 권유로 최승환과 환영단원들은 대한독립단에 가입한 상태였으므로, 지사들을 추가로 끌어 모아 왕십리 강지형의 집에서 경기지단을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대한독립단은 경성에 총기관을 두고 지도자로 의친왕 이강을 추대하려고 부관 어담을 통해 접근하는 과정에서 발각되어 1920년 11월부터 1921년 봄에 걸쳐 김기한, 강지형 및 경기지단원들이 줄줄이 체포되었다.

검거된 13명은 함께 격문, 사형선고장, 영수증 등을 인쇄, 배포하며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의 죄로 1921년 9월 3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김기한(8년), 최승환‧이섬 4년, 강지형‧홍영전 3년, 정순영 2년, 송내호 1년, 이주호 8월, 안흥기‧고윤원‧정무순 6월(고윤원은 집행유예), 안영기‧송명근 무죄의 선고를 받았다.

궐석재판으로 징역 4년의 중형을 받은 최승환은 만주로 망명하였다가 공소시효가 소멸된 것으로 착각하고 1928년 들어왔다가 체포된‘3.1운동범 최승환’이라고 동아일보(3월 20일)는 전하고, 조선일보(3월 23일)는 ‘유명한 한학자’로 관헌의 눈을 피해 가평군에서 한문선생을 하며 지냈다는 법정 증언을 전했다. 허헌 변호사의 열띤 변호 덕분인지 1928년 3월 2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고윤원은 최승환의 심복과도 같은 역할을 하던 자로, 안흥기‧안영기 형제의 집에서 격문 등 인쇄물을 찍고 보관, 배부하였다. 30년대부터는 회기리에 거주하며 1950년 2대 민의원 선거에 동대문구에서 출마하여 차점으로 낙선하였다. 휘경동에 토지도 많아 청량리초등학교 이사를 지냈으나 6.25때 납북되었다.

손명근은 장로교인으로 만주에서 김기한 등과 함께 국내로 파견되었다. 국내에 배부할 인쇄물을 볏자루에 넣어 자신의 집으로 보내 보관하였다. 면목초(면목학원)의 설립자(1930)로 1998년 후손이 세운 기념비가 교내에 남아 있다.

이상, 도합 6인의 중랑구 애국지사를 소개하였는데, 경기도는 이 분들을 고양군과 양주군의 인물로 소개하고 있다. 중랑구는 문화적으로도 서울의 변두리로 남고 싶은 것일까. 지역의 문화기관은 대한독립군환영단을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의 스토리텔링에 나서길 바란다. 

   

<조선일보 1928.3.23. 최승환 공판 기사 ‘범행한지 8년 만에 법정에 선 한학자, 기미년에 경고문 초(草)하던 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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