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식 작가

(사)한국내셔널트러스트 이사/망우리분과위원장

『그와 나 사이를 걷다-망우리 사잇길에서 읽는 인문학-』 저자

1950년 9월 30일 오후, 미군 한 명과 국군(카투사) 세 명이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망우리 어느 묘 앞에 진을 치고 있었다. 멀리서 포성이 들려오는 가운데 그들은 한강 쪽을 계속 지켜보고 있으나 아직 적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미군 스미스(Smith)가 묘의 큰 비석을 보고 말했다.

“헤이, 미스터 채(CHAI), 여기 무덤 비석이 꽤 큰데? 누구 묘지?”

“음, 조선의 공주 묘라네. 프린세스 명온이라고 하지. 남편 김씨도 함께 있군. 남편은 프라임 미니스터(영의정)였다네. 사후에 받은 명예직이긴 하지만.”

“그래? 그럼, 미스터 리(LEE), 조선은 이 씨 나라(Lee Dynasty)였다며? 공주는 네 할머니가 아닌가?”

“맞네. 옛날 같으면 나도 왕자일세. 하하. 비석을 읽어보니 이건 우리 할아버지 고종 임금이 지시하여 세워진 것이로군. 명온공주의 오빠가 프린스 효명이라고 하는데 요절하였지. 효명의 부인이 조씨(조 대비)인데, 고종은 원래 정통 자손이 아니라 대원군이라는 친척의 아들이었네. 조 대비가 그 아이를 자신의 아들로 입적하고 왕으로 올렸기에, 프린세스 명온은 고종의 고모가 되고, 남편 김현근은 고모부가 되는 셈이지. 고종이 비석을 세운 건 이런 사연 때문이네.”

스미스는 미스터 리의 설명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한국에 와서 왕자를 만나다니, 왕손이 아니라면 이런 설명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미스터 차(CHA)가 웃음을 참지 못하는 표정으로 끼어들었다.

“이 묘는 원래 고려대 근처 산에 있었는데 1936년에 이곳으로 이장되었네. 그런데 스미스, 미스터 리가 내 고교 동창이라 잘 아는데, 대학에서 사학을 전공하긴 했지만 왕손이란 건 새빨간 거짓말일세. 이 씨는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인구가 많다네.”

“그래? 하하하…….”

모두 한바탕 크게 웃었다. 그러나 갑자기 멀리서 크게 울린 포성이 모두의 웃음을 멈추게 하였다. 모두의 얼굴에는 그늘이 드리워졌다. 잠시의 침묵을 깨고 스미스가 말했다.

“……그런데 우리, 기념으로 이 돌 위에 이름이라도 새겨 놓자고. 전쟁이 끝나면 여기서 우리 다시 만나는 게 어때?”

그러자 미스터 리가 말했다.

“내 조상 묘의 상석을 훼손하는 건 좋지 않지만 언제 죽을지 모르는 우리니까 용서해 주시겠지. 우리가 세상에 남기는 마지막 기록이 될지도…….”

넷은 각자의 대검으로 상석을 쪼아 알파벳으로 이름을 새겼다. 스미스가 한가운데에 새기고, 주위로 채임태(CHAI IM TAI), 이덕진(LEE DUK CHIN), 차 아무개(CHA J)가 새기고, 네 귀퉁이의 빈 곳에 미스터 리가 태극 마크를 새겼다.

그들은 전사했을까. 아니면 모두 혹은 누군가 살아남아 다시 이곳을 찾아왔을까. 시인 고은의 『만인보』에 실린 「망우리묘지」라는 시가 그날의 상황을 전해준다.

“공동묘지도 전쟁은 가만두지 않았다// 망우리 공동묘지는/ 서울의 저승/ 1950년 9월 30일/ 그곳조차/ 싸움터였다// 6천개의 무덤들은 엎드려 있고/ 유엔군과/ 인민군은/ 무덤 사이/ 총탄 빗발치다가/ 서로 달겨들어/ 총검으로 찔렀다// 전사자의 시체가/ 무덤 사이/ 여기저기 널브러졌다/ 흑인병사/ 백인병사의 시체/ 인민군의 시체/ 벌초하지 않은 풀/ 깔고 나뒹굴었다// 사투 1시간 15분/ 쌍방 시체 73구// 이상/ 망우리공동묘지는 다시 묘지로 돌아갔다”